'KOR S2(2011.8-2014.11)/Ep2高陽(2012-2014.11)'에 해당되는 글 73건

  1. 2014.11.05 D-5
  2. 2014.10.05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
  3. 2014.09.19 마음이 터져버릴 정도로 마음껏.
  4. 2014.09.11 티켓 구매 완료한 시점에서.
  5. 2014.08.20 결심.
  6. 2014.08.15 그다지썩좋지않은타이밍.
  7. 2014.08.05 _ '그'
  8. 2014.06.22 6월이 간다.
  9. 2014.06.06 이게운명이라니.
  10. 2014.06.02 안녕, 삐삐.
  11. 2014.05.29 두가지이야기.
  12. 2014.05.26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자 과제인, 그것에 대하여.
  13. 2014.04.09 やってられねぇわーと思う毎日の話。
  14. 2014.04.01 -
  15. 2014.03.24 주소변경
  16. 2014.03.23 네이년 2
  17. 2014.03.02 꼰대가되어간다
  18. 2014.02.25 -
  19. 2014.02.25 영어학원이야기
  20. 2014.02.01 '나의 새해'의 바람.
휘몰아치는 한 달이었다
벌써부터 피곤하고 지친다
비행기에서 종일 자야지.... 란 생각 뿐.

모르겠다
가봐야 알 것 같다

머리 속은 신났고,
현실은 환장하고.

확실히 지금이 때라고 생각한다
나가기로 하길 잘했다
더 이상 못 버틴다
한계점.
한국 생활 지치고 지치고 지쳤어...  
3년을 버틴 내 자신에게 리스펙트. 
Posted by mosa. :
비자 최종 승인 메일이 왔다.
정말, 잠만 서른 몇 번 정도 자고 일어나서 새벽에 첫차로 공항버스 타고 가서
체크인 하고 출국 수속하고 비행기 찾아서 타고, 홍콩 가서 몇 시간 기다렸다가 다시 몇 시간 비행기 타고 가면
멜버른이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것은 기쁘고도 두려운 일이다
서울을 떠날 때에는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더니, 서울을 떠나는 일은 너무나도 홀가분하다


나는 정말 도시랑 연애하나보다
늘 생활을 정리할 때 경험해본 적도 없는 연애감정이 느껴진다
동경은 아련한 첫사랑이었고, 서울은- 이혼을 앞둔 부부.ㅋㅋㅋ 

멜버른은 또 어떨까.
대만의 타이난은 어떻고 베를린, 하이델베르크는 어떨까. 

멜버른은 내게 어떤 연인이 되어줄까.
 
내가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성숙한 도시였으면 좋겠다
타이난은 내가 아이로 돌아갈 수 있게 한 없이 순수한 도시였으면 좋겠고.
베를린과 하이델베르크는 내가 모든 걸 발산할 수 있도록 나를 지지해주는 도시였으면 좋겠다. 
Posted by mosa. :
앞으로 강남에서 만나는 건 피해야겠다
눈 앞에서 버스를 놓쳤더니 45분을 기다렸다

그 기다리는 45분 동안
시끄러운 거리의 도움을 받아 음악을 조금 크게 들으며
여러 생각을 했다

아마ㅡ
호주에서의, 멜번에서의 시간은 한계에 부딛히는 순간들의 연속일테다
가장 큰 한계는 언어적 한계이고 그 다음은 육체적 한계와 정신적 한계.

한국에선 머리회전의 한계와 기억력의 한계만 느끼고 있기 때문에, 위의 것들은 느껴본 지 오래인 야생(???)의 감각이다

동시에 난 정말 변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안정감을 취하고 싶어하는 30대에
안정감이 싫어 끊임없는 불안정에 나 자신을 던지기로 했다

안정감이 나 자신을 좀 먹고 내 삶을 무미건조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더 이상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을 수 만은 없다고 느껴졌다

다시 모든 오감, 육감을 동원해 
한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모든 세포가 긴장상태를 유지하며
주변의 모든 것들에 촉수를 꽂아 쫙쫙 빨아들이며 살고 싶다
이 느낌이 어떤 느낌인지 전달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살아야지만 살아있음을 느끼는가 보다

지금 문득 든 비유로는
지난 삼 년의 시간은 마치 동물원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었고 드디어 야생으로 다시 돌아가는 느낌이다


자유로운 움직임으로 
모든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며
나이 따윈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일본에 있었을 땐
늘 일본으로 떠난 만 22세의 느낌으로 살았다

귀국 후 재학 중에는
아무 느낌이 없었다

요즘은
매일이 만 25세로 돌아간 것 같다
2학년, 불안과 기대감 한가득으로 꿈을 먹고 살 때였다
기분이 좋다 계속 이 마음으로 살고 싶다




드디어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었다
이름은 오랫동안 고심했고 적당히 적절한 이름으로.
사실 예전에 지어놓은 이름이다
/ohmybittersweetcity

폰으로 만들기만 한 상태라
아무 것도 없고 심지어 공개상태일 것이다
정식 개장은 출국 직전.

페북 페이지엔 
텍스트는 최소화하고(전체공개의 공간이니까)
사진과 그림 위주로 올릴 예정이다
업로드는 주 1~2회로 제한.

텍스트는 페북 타임라인(일부 친구 공개)과 블로그(이웃, 서로 이웃 공개 등)로 주변 사람들과만 공유할 예정.


카톡은 없애고 가기로 했다
이메일과 라인, 페이스북, 트위터로만. 
이정도면 국제전화와 메일 밖에 없던 시절에 비하면
충분히 많지 않은가?
Posted by mosa. :
너무 마구 휘몰아치게 진행시키고 있는 감이 없잖아 있다
나 스스로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진행한다는 점은 느껴지지 않고,
마치 영화 시작 20분 전까지 취소 가능한 영화 예매하고 자는 기분으로 비행기를 예매했다

날짜도 마구 정했다
골라놓은 날짜 5일과 10일 중에서
5일은 도착하면 바로 주말이라는 이유(일본에 간 날은 금요일이었고, 나는 이틀 동안 손가락만 빨았다) 때문에
바로 10일로 결정, 예매.

예전에 키요세 집을 구할 떄,
너무 머리 아프고 귀찮은 나머지 집을 그냥 질러버렸더니, 엄마였나 여동생이었나가
'너무 생각 없이 지르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번 호주 건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크게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진지하게 준비한 것이 아닌 만큼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또 이렇게 해야된다고 생각한다 

남들처럼 긴 시간 준비한 게 아니다
8월 말, 이미 호주로 가기로 정한 상태였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온 한국 생활에 대한 스트레스, 하루라도 빨리 '내가 이곳을 떠난다'라는 걸 증거를 만들어야만
내가 마음이 편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나는 이제 한국에서 그만 살고 싶다.
사람들과 사회에게 받는 스트레스도 크고, 
무엇보다도 서른이라는 1년을 두고 생각해 보았을 떄, 아무 것도 안 한 것만 같아,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 자체가 아깝다라는 생각을 하니,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단 두 달이라도 꿈틀대기라도 해서 이 1년을 그냥 시체처럼 지냈다는 오명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알바-백수를 반복했던 21, 22, 23의 반, 이 2년 반의 시간이 나는 무척 아깝고 아쉽다
좀 더 농도 있게 살았으면 좋았을텐데-라고.
물론 당시에는 마음 껏 뒹굴거리고, 책도 많이 읽었던 시절이라 딱히 100% 후회되는 건 아니지만,
그 시절을 늘어지게 보냈다는 것이 두고 두고 아쉽다
그러다보니 똑같은 시간을 나이 서른에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

내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나누고 싶지 않지만, 한국에 돌아와 새로 사귄 사람들과 그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반응이 확연히 갈린다
새로 사귄 사람들은 친하든 안 친하든 한국 특유의 오지랖 걱정을 발사해준다
'결혼해야하지 않냐, 너도 니 인생을 준비해야하지 않냐' 등의 서로의 인생에 하나 영양가 없는 명절st의 질문들.

 
정말 신기한 게 나와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 가족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이미 포기한 상태인 걸까.

2011년 3월 지진 직전에 여동생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놀러왔었다(지진 맞고 바로 귀국)
여동생과 함께 이케부쿠로 선샤인시티 지하의 오코노미야키 가게에서 함께 식사를 할 때, 여동생이 말했다
"엄마랑 나는 그냥 언니가 뭘 하든 냅두기로 했어ㅋ 언닌 그래야 하는 사람이야ㅋ 엄마랑 언니는 그냥 일본에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했어ㅋㅋ 언니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ㅋㅋ"

이번 호주 건도 엄마에게만 넌지시 말하고 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아마 페이스북으로 보고, 엄마에게 물어보는 정도일테다
여동생은 호주 워킹 건에 대해 처음으로 코멘트를 했다(페이스북에) 
"내 생일선물 안주려고 튀는건아니지??ㅎㅎ 호주에서 보내주려고 그런거지??ㅎ"(여동생의 생일은 11/12이다)

가족은 내게 장녀로서의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인생을 산다  
풍족하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았던 가정환경에서,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지원해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주었다
지원해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을 때, 우리 삼남매는 각자 알아서 각자의 방법으로 해결했고,
부모님이나 형제가 서로에게 이를 못하게 하거나 한 적도 없다
난 이점이 무척 고맙다

친구들,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마운 것은, 내게 저 오지랖 걱정을 펼치며 말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애초에 한국 생활은 길지 않고, 다시 출구할 것이라고 못을 박고 시작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 명 쯤은 '그래도...'라면서 말릴 법 하건만, 말리기는 커녕 많은 응원을 받고 있다

특히 호주행은 지난 겨울, 지인의 예상치 못한 사망으로 취소했다가 재개하는 만큼,
다들 그러려니- 하는 듯 하다.

근데 사실,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응원인지 모를테다
거기다 '대놓고 응원'해주면, 그 응원에 힘입어 발을 동동 구르다가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 

하고 싶은 것은 많다

거주형태는 쉐어가 될테고, 한국인을 제외한 아시아인, 유럽인 등이었으면 좋겠다
한국인, 미국인은 피하고 싶다

일은 기왕이면 스시 레스토랑에서 하고 싶다
매일 스시 먹고 싶다 몸에 방사능은 쌓여가겠지만 아이 돈't 케어.
와따시와 스데니 호-샤노-노 카타마리다제.

기왕이면 시티쪽에 살고 싶다 
가서 사진을 많이 찍고 싶다(사실 머리 속엔 이 생각 뿐이다)
돌아다니면서 사진 많이 찍어야지
가볍게 그림도 그리고 싶다 

언젠가는 책 내고 싶으니까(....) 결과물 공개는 해야지.


페이스북 페이지는 '긍정적인' 사진들로만 올릴 예정. 텍스트는 최소화하고.
텍스트의 경우엔 네이버 블로그 전체공개+페이스북 친구공개를 이용할까 한다 
페이스북은 노출도와 전파력이 높은 매체이다
굳이 불특정 다수의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을 공유하고 싶은 것은 내 주변 사람들 뿐이다
불특정 다수에게는 '좋아요'를 많이 눌러줄 법한 적당한 예쁜 사진 정도로만.
포장할 건 해야지. 포장 안 된 속살은 내 주변에게만.

외국 생활이 마냥 좋을 수 만은 없다 
일본 생활도 지금 그 상황이 아니니까 좋았다 그립다 하는 거지,
사실 당시에는 시궁창이 따로 없었고, 매년 '제발 행복해지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다 


=== 

'잘' 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성공'적인 워홀을 보내고 싶은 생각도 없다
고생도 해보고 싶고, 좀 이것 저것 다양하게 경험하고 싶다.
그리고 성공의 기준은 모두 다를테니.

돈- 벌어오면 좋은 것일 뿐.
목표 금액은 한화 1000만원/호주달러 1만불이지만,
만족할만한 금액은 한화 5백만원/호주달러 5천불 정도이다


즐겁고, 행복하고, 자유롭고, 가슴아프고, 괴롭고, 힘들고, 외롭고-
모든 감정들을 느끼며 
힘껏 크게 웃고, 힘껏 엉엉 울고,
내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표출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한국에서의 3년간의 생활하면서, 4년 간의 일본 생활에 대해 내가 가장 그리워한 것은, 
모든 감정들에 솔직했던 나 자신이었다 
웃고, 울고, 화내고, 즐거워하고.
3년 동안 사방에서 칼로 쳐내진 기분이다 

나는 다시 내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살아있음'을 느끼며 산다면, 그걸로 됐다 
한국으로 돌아와 3년 동안 만난 사람들이 내게 오지랖을 떠는 이유는,
내가 그들에게 보여준 모습이 '무기력한 시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되'찾는 것에 중점을 두고 싶다 

 
Posted by mosa. :
연휴가 끝나고 날짜가 18일로 바뀐 새벽.
여기 저기에 마구 써댔다

11월에 호주에 가겠다고. 


취소하고 안 가면 고개도 못 들정도로 쪽팔리게.
어떻게든 가라고.

2달 반 정도 남았다

이제 그만 있어야지- 
있을 만큼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 30살의 1년을...
그저 앞으로를 위한 비용을 모으기 위해 죽은 듯이 있는 것이 싫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의 무언가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점점 가라앉아 땅에 붙어가는 자신이 느껴졌다
安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단어들이 내 삶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단어들이 나를 망치고 있다고 느꼈다

준비할 것들이 많다
우리 집도 이사를 간다고 하니 이사 가기 편하게 도와줘야지.

언어는 그닥 걱정하지 않는다
걱정하는 것보다 가서 걍 마구 뱉는 게 훨씬 빨리 배운다는 걸 안다
여기서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가서 사람들이 어떤 말을 쓰는지 보고 들으며 데이터를 모으는 게 내 방식이다
수다쟁이이니 걱정 없다

언어가 되지 않아 일을 구하지 못해 돈을 날린다고 해도 지금으로선 괜찮을 것 같다
돈 날리는 것 조차도 각오하고 간다
난 돈 몇 푼 날리는 것보다 지금의 이 젊음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한국에서 조용히 지내며 날리는 게 더 아깝다

9월, 10월은 오전/오후 동시에 들어간다
사람들 만나 인사할 시간을 확보했다 

가족 중에선 아빠한테 많이 미안하다


카테고리 변경 완료.
블로그는 어디를 써야할까. 역시 네이버일까...
페이스북 페이지 이름은 뭐라고 하지.... 


 
Posted by mosa. :
이사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지 벌써 다음 주로 1달이 다 되어간다
3주 동안 머리도 혼란스럽고 마음도 싱숭생숭하다

어제 보러 온 집이 저번에 보러 왔던 집이라는 것에,
집이 팔릴 가능성이 갑자기 화아아아아악 높아지고,
나는 조금 혼란스럽다.


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사실 한국 생활을 이 시점에서 끝내는 것에 아쉬움이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화실일 것이다
이제 막 진채화를 시작하고, 작품 하나가 완성되어가고, 두 번째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당장 남은 시간이 두 달 뿐이라고 생각하면,
조급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어 아직은 아닌데.. 아직은 화실 다니고 싶은데..'라는 마음이 커진다
그렇다고 해서 화실을 다니기 위해 이사간 곳을 기점으로 다시 일을 구하고 6개월 가량 일하고 나가는 것은,
구직 스트레스도 있고, 이것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언어도 금전적인 면도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난다
사실 이번엔 내 의지<있을 곳이 없어 나감- 인 점도 있어,
드디어 외국에 나가서 산다는 마음에 마냥 신나기만 했던 7년 전의 일본 워킹 때와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사실 이사에 대해... 어느 쪽으로 결정이 나든
마음이 무겁다


===
여러 가능성이 존재하니, 각 가능성들에 대해 대략적인 계획을 세워보았다
이건 8월 초 경에 세운 계획이다 지금은 갑자기 1이 유력해졌다

1. 만약 올해 안으로 집이 나간다면ㅡ
나는 집 나가는 게 결정된 날+1달 일하고
그 1달 동안 호주로 갈 준비를 하고 바로 호주로 출국.

2. 내년 초에 집이 나간다면ㅡ
이사갈 때까지 일 하고,
이사 간 이후 2주~1달 동안은 이사짐 정리 하고,
사람들 만나며 인사하고 바로 대만으로 출국.

3. 결국 이사를 가지 않는다면ㅡ
내년 5월 말~6월 초까지 빵팔이 하고
바로 6월 중순에 대만 출국.


처음엔 늦어도 10월 초까지만 일하자- 했지만 금전적인 거 생각하면 10월 말까지는 일하고 싶다
10월 말까지 일하고 싶다-라고 해도 결국 사람 구해지는대로-아마 10월 초중순 쯤에 빠지게 되겠지....

===

이번 일에 가장 언짢은 점은,
내 인생인데 3개월 앞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긴, 내일 새로운 신입과 함께 하는지 안 하는지 조차도 모르는데 3개월 후의 일을 내가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근데 2011년 5월 말에만 해도 내가 3개월 후에 한국에 돌아가있을 거란 건 생각지도 못했다
어.. 이렇게 생각하니까 이 상황이 조금은 받아들여진다

... 그때랑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넘기려니 머리가 지끈해진다
사실 그때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괴로움'이라는 단어로 기억하고 있다


=== 

나가고 싶다
한국을 떠나고 싶다
나는 다시 내 삶에 활력을 넣고 싶다
안정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 속이 아닌,
모혐을 감수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에게 에너지를 받으며, 나도 함께 빛을 발하고 싶다 
한국의 '안정'을 우선시하는 면에 많은 괴리감을 느낀다

나는 서울은 재미가 없다
다들 사는 건 치열한데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건강하지 않다
'어쩔 수 없이'라는 말이 너무 많이 보이고 들린다
능동적인 움직임보다는 수동적인 움직임의 사회이다
나는 갑갑함을 많이 느낀다

나는 재밌는 사람들이 만드는 명랑한 사회가 그립다
비록 그런 사람들이 지극히 일부라 하더라도 내 주변엔 그런 사람으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나는 도무지 이곳에 정이 붙지 않는다
정을 붙이려고도, 정을 주려고도,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걸지도.

===

슬슬 내가 대학 졸업을 위해 20대를 팔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약간의 쪽팔림?과 비슷한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

이 두려움은 아무래도 이제는 1주일의 주기를 갖고 찾아오는 것 같다
두려움의 특정한 대상은 없는데 그냥... 마냥 보이지 않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인 듯 하다

마음의 먹구름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Posted by mosa. :
어쩌면 이 극도의 피곤함은 '그'에게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전 파트너와 함께 할 때엔 적당한 시간에 일어나 무려 '독서'도 하곤 했는데, 생각해보니 최근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책을 손에 대지도 않은 것 같다. 사실 '그'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끝도 없다. 내가 왜 10살이나 어린(학년으로는 11년 차이..) 핏덩이를 데리고 이 고생인지.

사실 '그'를 보면 한 사람이 생각난다. 이노우에 챠트라 고-타. 무려 미들네임이 있는 이 혼혈의 일본인은, 마츠야의 동기 쯤 되는, 나와는 7살 정도 차이나는 남자사람. '그'의 머리 회전 속도나 센스의 수준은 챠트라와 비슷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알바는 둘이서 일하는데 파트너가 챠트라 같은 놈이야"라고 말한다면, 마츠야의 멤버들은 모두 내게 측은한 마음을 가지며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려주며 힘내라, 기운 내라, 고 응원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생각난다- ㅎㄹ쨩. 언제나 제멋대로 하는 그 알 수 없는 행동들. 아마 '그'는 이 두 사람을 반반 쯤 섞어놓은 듯 하다. 

물론 내가 '그'에게 감정적인 언행을 하곤 한다. 나는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그'가 내 안의 나도 모르고 있던 또다른 나를 꺼내준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서른 살의 나는 조금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챠트라에게 "걸리적 거려あんた邪魔だよ"라는 말을 해서 꽤 긴 시간 챠트라의 친구들에게 무시를 당했고(선배라는 작자-S야마-는 따돌림까지), ㅎㄹ쨩에게는 "니 머리는 장식품이냐?お前の頭は飾りもんかよ?"나, "머리 좀 써-제발 좀- 頭使えよー頼むよー" 등의 폭력적인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파트너에게는 아직 이러한 말들이 마음 속에만 존재하고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서른의 나는 조금은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할 만도 하지 않은가. 적어놓고 보니 또다른 나가 아니라 과거의 나이긴 하지만, 챠트라도 ㅎㄹ쨩도 또다른 나를 꺼내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의 언행에 불쾌해 한다. 속으로 '누난 듣는 사람의 기분을 생각 안 하나요?'라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기류를 느끼는 나는 소심하기 짝이 없어,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왜 얘 눈치를 보면서 일해야돼??'라고 깨닫게 되는 순간, 꼭 역전의 기회는 찾아온다. 내가 그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에게 느꼈던 아주 작은 미안함이 사라지는 순간, 그는 가시방석에 앉게 된다. 그리고 나름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부단히 애를 쓰지만, 안타깝게도 먹힐 리가 없다. 자신이 노력하면 누나의 무서운 얼굴이 풀릴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가게를 나가는 순간까지도 오지 않는다.

사장님은 그의 시급을 올려주는 이유를 "잘 참아서"라고 말했다. 나의 거친 공격에도 그는 '잘 참고' 있어주었기 때문인가보다. 사장님은 한 가지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무시하고 있다. 그것은 거칠게 말이 나올 정도로 문드러진 내 속. '그'와 사장님은 모르고 있다. 사장님은 내가 가게를 그만두려고 하는 것 조차도, '그'는 내가 가게를 그만두려고 하는 80%의 이유가 본인이라는 것도. 나의 언어 선택과 말투가 점점 사나워지는 것은 곪고 곪은 고름이 터져나오는 것과 같다. (사장님도 자꾸 내가 '말이 세다'라고 하는데, それは貴方に言われたくありません。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니죠. 감정의 기복이 심해 종종 직원들에게 익룡 스크림을 발사한다.) 그렇다면 나의 입은 왜 이렇게 거칠어졌는가. 처음의 파트너와는 워낙 잘 맞았고, 그 이후에 스쳐지나간 몇몇의 교육생들에게도 이런 언행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왜 유독 '그'에게만 거친 것일까. 귀찮은 동성관계가 아니라서? 라는 점도 물론 나의 거친 말들이 나올 수 있는 밑바탕이 되기도 하지만, 가장 문제는 '그'는 정말 환장할 만큼 속터지는 외곬이라는 것이다. 


나는 종종 청소기를 밀며 5無(철, 센스, 눈치, 염치+배려)의 '그'에 대해 결론을 내곤 한다-군대를 안 가서 그래. 사장님은 그에 대해 "남자애들은 어쩔 수가 없어. 우리 아들들도 그래-"라고 하지만 여기엔 이상한 모순점이 있다. 나와 함께 일했던 남자들은 대부분이 철도 센스도 눈치도 염치도 배려의 수준이 엄청 높았다. 챠트라의 친구였던 호리에, 타카츠, 그들의 선배였던 아카이, 점장 츠치다, 그 외의 선배들. 물론 경주마처럼 바로 앞만 보고 주변을 보지 못하는 챠트라, 하루쨩, 아베쨩 등등이 있긴 했지만, "남자=센스 없음"이라고 하기엔 내가 알고 지낸 남자들은 그런 사람이 오히려 드물었다. 물론 이것을 한국인/일본인의 특징으로 구분 짓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더 웃긴 건 이 '없는' 남자들이 군대만 다녀오면 그 중 상당수가 그동안 갖고 있지 못했던 것들을 몸에 장착해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조심스럽게 답을 내보면 '가정'이라 생각한다.

물론 나는 그의 가정이 어떠한지 모르겠고, 나의 남동생도 군대 가기 전엔 5無의 인간이었고, 지금도 딱히 완벽하게 개조(!)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가정에 대해 함부로 말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2남 중 막내이고, 분리수거도, 쓰레기 버리는 것도, 설거지도, 칼질도 모두 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처음 해봤다-라는 부분과 매일 배고프다고 징징대거나, '어차피 누나가 해주겠지'라며 심각하게 남에게 기대는 점, 무엇보다도 상대방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보거나, 남을 배려해야 한다-가 아니라 본인이 배려 받아야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점에서, 집에서 상당히 우쭈쭈하면서 자란 아주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막내 아들"이라는 것만큼은 확언할 수 있다. 내가 초반부터 그에 대해 불만인 점 중 하나가 "나는 그의 보모가 아니다"이다. 두 달 내내 쫓아다니면서 뒷정리를 해드렸다. 나는 왜 2달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내가 그에게 잔소리를 해야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안하면 나도 분위기 나빠질 일 없어 좋지만, 아무 말도 안하면 속으로 썩어가는 건 내 속 뿐이고, 눈치 없는 그는 절대 모를 것이고, 나는 그의 지적질 포인트들을 매일 봐야만 할 것이다.

나는 그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으며, 나는 그저 그와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눈꼽만치도 하고 있지 않고, '나도 센스 좋은 여자애랑 하고 싶다'가 현재 함께 일하는 '그'에 대한 총평이다.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해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 것인지. 내가 왜 취직을 안 하고 집 앞 빵집에서 프리터를 하는지 '그'는 그 이유와 의미를 무참히 날려버린다. '그'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스트레스 받을 일이 있을까.

언젠가 그가 내게 그동안 쌓여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설령 그러더라도 피할 생각도 없고, 오히려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 오픈이 될 것이다. 그는 내게 '가끔 말이 심하다', '공포분위기 조성한다', '지적질이 너무 심하다' 밖에 할 말이 없을 것이니까. 그리고 할 말은 내가 더 많을 것이다. 나야말로 그동안 말하지 않고 쌓이기만 한 것들이 한 트럭이니, 한 번 열어버린다면 아마 둘 중 하나가 그만두는 것 외엔 마무리되지 않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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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나 저러나, 나는 그에게 함께 오후조를 하는 것은 9월까지라고 말해놓았다. 사실은 언니선배님의 빈자리(오전-오후 동시에)에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다행히 아무래도 후임이 구해지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듯 하여, 이상태로는 플랜B였던 '멜버른 행'을 선택하게 될 것 같다. 물론 이 선택을 하는 것도 많은 고민이 따른다. 우선 가장 고민의 요소(70%)는  갑작스럽게 중단해야만하는 '화실'이고, 나머지 20%가 아슬아슬한 자금, 10%가 가족이다. 화실도 가족도 이번에 나가면 한국에 돌아오는 건(물론 국가 이동 할 때마다 들르겠지만) 3년 후가 된다. 갑작스럽게, 그것도 위험하다는(!) 호주에 간다고 하면 당연히 반대하겠지. 

최근의 가장... 몹쓸 선택은 '알바 선택'이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 때문에 후회는 하지 않는데, 그 대가가 좀 많이 아프다. 솔직히 이건 모두 내 탓보다는 '그'의 탓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mosa. :
시간은 흐르고, 나는 늙어가기만 한다.


7월부턴 피겨를 개인강습을 받아야겠다
주 1회 17만원...이라는데 이건 월자유이용권이 합쳐진 것인가?
가장 문제는 시간대. 5~7시? 6~8시?인가가 개인강습 시간대.
나는 오전에 받고 싶은데.
집 앞의 링크장 두고 목동까지 갈 순 없는 일이다. 

영화를 매일 예매하고 매일 자기 전에 취소한다
과연 엣지오브투모로우 4DX는 볼 수 있을 것인가.
월요일엔 진짜 가야지. 

이틀 쉬는 동안 나의 파트너는 일을 잘 하셨나 모르겠다 
Posted by mosa. :
죽는 건 뭐고 사는 건 뭔지...
'가족'과의 죽음으로 인한 영원한 이별은 철 들고 나서는 처음이다.
앞으로 무수히 많은 죽음과 이별을 경험하게 될텐데...
어떻게 이겨내면서 살아야 하는 건지...
나는 그 아픔과 슬픔들을 견뎌낼 수 있을까..
아니면 정말 잊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멈추어버린 누군가의 시간.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났지만, 나는 30대가 되었고, 그는 29살에서 멈추었다. 
 
누구보다도 길었던 할머니의 시간도 멈추었다

엄마의 시간이 멈추는 날, 아빠의 시간이 멈추는 날...
종교가 없고, 사후세계를 믿지도 않으며, 오직 현세만 생각하는 내게,
그 시간, 그 날들은 얼마나 고통의 순간으로 기억될까...
남은 나의 생은 멘탈이 안녕할까.
동생들의 시간이 나보다 먼저 멈출까봐 무섭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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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쳐오른다 
Posted by mosa. :
1. 내 지갑 속엔 늘 미화 100달러짜리 지폐가 있는데,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것을 환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음향과의 인연도, 선생님과의 인연도 끊긴 상태에서, 이 지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나의 결정들을 모순되게 만든다. 다만 환전하였을 때 생기는 10만원 가량의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남아있기는 하다.

일본 유학 시절, 냉장고에 엄마의 편지와 함께 붙어있던 지폐였다. 나의 기타 선생님께서 레코딩을 전공하겠다는 내게, "나중에 니가 내 앨범 녹음 해주라. 이건 계약금."이라며 지갑에서 꺼내 준 돈이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삶 자체가 힘든데 취직이 되지 않아 마음도 몸도 모두 힘들었을 당시에, 그래도 내가 포기하지 않도록 지탱해 준 것은 냉장고에 붙어있던 엄마의 편지와 이 100달러짜리 지폐였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종로의 이자카야에서 2달 일하고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옮겨갔다. 당시 이자카야의 실장님에게 말했던 말을 나는 기억한다. "아직은 음향쪽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않았고, 그래도 거기 가면 작은 기계라도 만질 수 있고, 음향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에요." 
그리고 선생님에게 들은 말은 "널 뭘 믿고 맡겨. 넌 니 일이나 해."였다. 맡겨달라는 말을 한 적도 없고, 녹음하고 믹싱하는 거 나도 보고 싶고, 지금 의뢰받아서 작업하고 있는 것 말고, 그냥 특정 짓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도 레코딩 하고 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저 말 한 마디에 지푸라기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현재는 음향과도 선생님과도 인연이 끊긴 상태. 100달러짜리 지폐는 더 이상 나를 지탱해주지도 않으며, 선생님과의 좋지 않았던 긴 인연의 끝마무리만 상기시켜줄 뿐이다.


2. 사실 환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오늘 ㄴㅂ님과의 긴 대화를 나누고 집에 가는 길에, 내 안에서 무언가가 끊긴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끊긴 것이 무엇이냐하면... 동경과의 아주 가늘게 이어지고 있던 인연이다. 돌아오는 길에 여름에 가기로 했던 동경을 가야하는가 말아야하는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2011년 귀국 후, 동경에 가는 것은 늘 내가 숨이 막힐 때 숨을 쉬기 위함이었고, 나는 지금 아직은 살만 하다. 오랜 친구와 엇갈리는 해외행 때문에 잠정 연기하고 있었던 동경행을 급하게 다시 불러오긴 했는데, 아직 내게 동경이라는 약薬은 시기적으로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전적으로, 시간적으로, 체력적으로 무리해서 2박 3일이라는 스케쥴로 가야하는가-를 고려해보았고,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순간, 동경이라는 늘 잡고 있던 지푸라기가 손에서 빠져나가는 듯 했다. 아. 너와 나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구나. 그리고 화정역에서 집으로 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일단 달러를 환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과의 오랜 관계의 퇴직금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어쩌면 그 지폐는, 나의 유학 생활을 나타내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레코딩 계약금이었고, 유학생활을 정신적으로 받쳐준 부적이기도 했다. 지폐를 환전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나의 유학생활과 이제는 헤어지겠다는 결심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이유는 모르겠지만, 동경과의 헤어진 후에도 끊어질듯 말듯 이어져오던 집착에 가까웠던 관계는 오늘 갑작스럽게 종지부를 찍었다. 모른다. 언제 또 마음 속에서 가고 싶은 마음이 마구 피어오를지. 


3. 무엇을 해야할지 모를 때엔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뭘 해야할지 몰라 일단 대학을 갔고, 역시 뭘 해야할지 몰라 대학을 그만뒀고, 일을 했고, 일본엘 갔고.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살았던 3년 반은 그것에만 몰두했고. 그리고 실패, 다시 목적 없는 삶을 살게 되어,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다시 대학에 가서 졸업을 했다.

졸업 논문을 제출한 작년 12월 13일부터 올해 구정 연휴가 있었던 1월 말까지. 지난 2년 반의 시간동안 '졸업만 하면 된다'의 그 졸업이 결정되자, '그 다음 순서가 뭐였지?'라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독일을 가기로 했는데 잔고에 편도 비행기표를 살 돈조차도 없었다.
목적을 잃은 삶, 그렇게 당혹스러운 채로 맞이한 서른. 지난 20대의 10년은 도대체 내게 어떤 의미였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2월의 나머지와 1월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겠고, 기억도 나질 않는다. 아르바이트 이력서 광탈의 시간들을 보냈던 것 같긴 하다. 갑자기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영어공부를 시작하자, 누군가의 눈에는, 30살이라는데 피씨방 카운터에 앉아있고, 어떨 때엔 그림을 그리더니 갑자기 영어 공부를 시작한 내가, 참 한심해 보였나보다. 내게 "목적이 없어보인다"라며 지나치게 쓸 데 없이 긴 조언이라는 설교를 했다. 아마 그 시간들은 남들이 보기에도 "쟤 뭐 하냐?"싶었을 시간들이었고, 나는 그 시간을 나에 대한 자기변호와 자기최면으로 채워갔다.


4. 지금도 다르지 않다. 평생 하고 싶었던 '직업'이 없던 내게 유일하게 하고 싶었던 직업인 '음향 엔지니어'는 증발해 이제는 그 흔적조차도 없어졌고, 그 이후로 여전히 하고 싶은 '직업'은 생기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말을 쓰는 것처럼, 음향은 내게 "유일하게 하고 싶었던 일/직업"일 것이다. 그리고 또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 닥쳤다. 그래서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원래 계획대로 독일에 가기로 했고, 그 자금을 모으기로 했고, 포기가 안 되는 대만도 상황 봐서 끼워넣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언제나 지금 할 수 있는 걸 일단 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지금 집 앞에서 빵을 판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最善이다. 그리고 다행히 이 생활에 적당히 만족중이다.


5.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2011년 8월, 4년간의 일본생활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이었다. 노력과 최선을 믿었던 만큼 실패로 인한 배신감도 컸고,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이후의 내게 있었던 몇몇 사건들은, 언제 어떻게, 갑작스럽게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내 코 앞까지 갖다놓았다. 그 공포를 코 앞에 두고 마주하며, 그 공포에 물들어갔다. 머릿 속에서 아무리 계획 세워봤자,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거라고. 그러니까 길게 보지 말고 짧게, 지금과 바로 앞만 보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내게 말한다. 계획이 필요하지 않냐고. 나는 답한다. 아무리 계획을 세워서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내가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나의 경험을 통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조심스럽게 밝히는 나의 당장의 진짜 "계획"은 하나다. "일단 35세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기". 이 계획은 꽤 오래 전에 세운 것이다. 그래서 35세까지는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하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할 생각이다.
(물론 33세에 결혼하여 35세에 출산하고 싶은 '막연한 소망'은 있지만, 이것은 계획이 아니라 그저 막연한 소망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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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할머니
어제 아침에 할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오셨다. 시골의 큰엄마가 아프셔서 서울에 올라와계시는 동안에 엄마가 할머니 돌봐드리러 잠시 내려갔다가 계속 제천에서 돌봐드릴 수가 없어 아빠와 함께 모시고 오기로 한 것이다. 아침에 할머니가 30분 후에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예전에 시골집에서 제천 시내로 차 타고 이동하셨을 때에 멀미가 심하게 나셔서 한참을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제천 할머니 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건 막내 고모인데, 막내 고모도 다음 달 환갑인 아빠와 8살 차이로, 내일 모레 70을 바라보는 나이이니, 아무리 딸이라고 해도 할머니를 돌봐드리기는 벅찬 것이다. 결국 집안의 가장 젊은 멤버인 엄마와 아빠에게 할머니의 보필 역할이 지어진 것이다. 

할머니는 의외로 괜찮으셨다. 문제는 하루가 지난 오늘. 아침에 드신 미역국이 몸에서 소화를 못 시켰는지, 정오가 지나자 토하시기 시작했고, 나는 그 이후 알바 다녀왔고, 자정에 집에 돌아오니 엄마 말에 의하면 할머니가 계속 아프셔서 한 바탕 난리였단다. 지내고 계신 남동생 방에 대변이 마구 산재해있고(100살 넘은 노인이 배변을 젊은 사람들처럼 컨트롤하긴 힘들다), 내가 돌아왔을 때에도 누워계시던 할머니는 일어나 갑자기 모두 토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아프신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계속 신음 소리를 내셨다. 혀가 입 밖으로 나와있어 행여 숨이 멎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계속 숨을 쉬고 계신지 나도 모르게 확인하고 있었다. 

늘 옷 속에 가려져 있었던 할머니의 가슴팍을 보게 되었다. 그 누구도 본 적 없을- 인간의 피부가 이렇게 주름이 많이 생길 수 있다니... 싶을 정도였다. 아마 할머니의 온 몸이 주름으로 덮혀져 있을 것이다. 할머니의 100년 넘은 피부 조직들은 탄력은 물론 색도 잃어 거무튀튀하게 변해있었다. 
죽음과 너무나도 가까이 있지만, 할머니는 늘 생과 더 가까이 있다.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최근까지도 내게 할머니는 영생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만난 할머니는 당신의 마지막 날을 향해 좀 더 가까워 진 듯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잠들었다가 눈을 뜨지 못할수도 있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닥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더욱 커졌고, 할머니가 당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곳에 있다는 점도, 언젠가는 반드시 올 그날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다시 제천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제천으로 돌아가신다고 해도 이전과 같은 몸상태로 매일을 보내실 수 있을까. 큰엄마가 몸이 괜찮으셨다면 할머니의 삶은 좀 더 길어질 수 있었을테다. 등등... 할머니와 함께 하는 이 순간이 소중하고, 동시에 매우 큰 불안감이 내 안에 가득하다. 
괴로워하는 할머니를 보고난 후, 방으로 들어와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사랑이의 애교를 보면서도 웃음이 지어지질 않는다.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의 깊게 가라앉은 마음이 아주 조금 느껴졌다. 

사실 할머니 다음으로 걱정되는 것은 엄마이다. 작년 말 외할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후, 병원 생활을 마치고 댁으로 돌아오셨지만, 움직이지도 말도 못하시기 때문에 혼자서는 생활이 불가능하여, 간병인을 한 분 두고, 엄마, 두 삼촌, 두 외숙모가 일주일에 1~5번씩 번갈아가며 할머니를 돌봐주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엄마대로 외할머니의 일 때문에 힘든데, 할머니까지 신경쓰게 되었으니 말이다. 엄마가 정이 많고 시어머니인 할머니를 잘 따른다는 점도 할머니를 가까이에서 대하며 엄마가 알게 모르게 속으로는 상당히 많이 슬퍼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 죽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죽지 않는 인간은 없다. 나도, 나의 가족도, 나의 몇 안 되는 친구들도, 모두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100년 안에 사라질 것이다. 다음의 14년인 2114년은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이건 절대 변하지 않을, 아주 절대적인 진리이고 진실이다. 

인간의 삶은... 초반엔 많은 만남들로, 후반엔 많은 헤어짐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과 영원한 이별을 하면서도 자신의 삶은 살아가야만 하고, 사는 내내 떠나는 것을 바라볼 뿐이며, 그리고 가장 마지막의 이별은 자신이 세상과 남은 사람들에게 고하는 이별, 드디어 본인이 떠나는 것. 어쩌면 나도, 만남만큼 헤어짐이 많을 나이에 접어든 느낌이 든다. 내 나이는 더 이상 절대적 젊음(20대)이 아닌 상대적 젊음이 되어버렸고, 이제는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가는 이별의 행진이 시작되는 것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나도 모르게 하고 있다. 참으로 이기적인 것이, 그래도 그 행진의 첫 걸음이... 나의 직접적인 가족이 아니길 바라게 된다.



3. 삶
어젠가, 그 '잘 가는 커뮤니티'에 '당신들은 왜 사냐, 왜 일하냐'라는 질문의 글이 올라왔다. 많은 글들에 나의 의견을 코멘트로 달곤 하는데, 그 글에는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 않아 답글을 달지는 않았다.

나의 부모가 내게 생명을 주었다. 한 부부의 첫 아이로, 잉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었을테고,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세포분열하며(!) 성장하는 나를 보며 수 많은 나의 미래를 꿈꾸었을테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부터 나 자신에 대한 고집이 생겼고, 나의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조종해가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기 위해 내 삶을 조종하는 키를 잡고 움직이며 놓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는 것인가.
부모가 생명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지 못해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뭐하러 고생하며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인지 말이다.
인간의 삶은 한 편의 영화, 드라마와도 같아, 끝이 분명 존재하지만, 끝난 후에도 분명 관객에게 작고 큰 영향을 미쳐,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한 누군가는 또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그렇게 인간은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끝이 존재한다고 해서 과정이 의미가 없다고 할 순 없다. 인간의 삶의 결과는 누구나 죽음이다. 절대 절대 절대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결과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무엇으로 물들이고 채웠는가-는 각자의 삶을 자신 스스로가, 혹은 타인이 평가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내가 아주 단순하게, 대략적으로 내린 결론을 말하자면.
내가 사는 이유는 말이다-
"내게 생명과 삶과, 그리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의 존재가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모두가 얽히고 설킨 유기적인 세상에서, 이 세상이 아주 조금이라도 인간의 정신이 풍족하고, 올바른 세상으로 정화되어 가는 것에 먼지만큼이라도 일조하고 싶다."
언젠가 백지였던 나의 삶이 내가 원하는 그림들로 채워져, 내 삶에서 가장 큰 이별을 하는 순간, 그 삶이 짧든 굵든, "만족스럽게 잘 살다 간다"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고 싶다.
그렇게 내 삶의 마침표를 예쁘게 찍고 싶다.
그리고 언제 눈을 감아도 예쁜 마침표를 찍을 수 있도록.



4. 리스트
내 삶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쭈욱 적어보았다
1997년 3월 외할아버지
2000년 2월 관계를 정의하기엔 애매한, 엄마의 사촌오빠인 줄 알았는데... 일단은 외삼촌
2000년대 초반 시골 큰아버지(아빠의 첫째 형)
2009년 9월? 관우네 엄마
2011~2012년 화곡동 아저씨(이모-엄마와 의자매-의 아버지로, 나를 무척 예뻐해주셨다)
2013년 12월 사망소식을 뉴스로 접한 민태씨

늘 말하지만, 나는 내 삶 29년 4개월동안 장례식장에 간 경험이 한 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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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8일째가 된다. 나의 희망과 다르게 생활이 엉망이 되었다. 지난 몇 달? 어쩌면 1년 넘게 나는 수면부족과 정상적인 수면을 취하고 있지 못함을 호소했다. 8시간 이상 자려고 노력해도 결국 5~7시간만에 일어나고, 꿈을 꾸지 않는 깊은 수면을 취하고 싶었지만, 매일 깊은 잠에 들지 못해 꿈도 매일 꾸고, 지난 2, 3월 학원 다닐 때엔 매일 매일 4~5시간 수면으로 버스로 이동할 때 늘 앉자마자 시체처럼 골아떨어졌다. 그리고 지난 일주일 동안,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매일 8~12시간씩 자고 있다. 도~~저히 일어나질 못했다. 일부러 알람 설정을 하지 않고 있는데, 자립으로 10시 이전에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보통 잠들기를 1시~5시, 일찍 일어나는 날은 10시 경에 일어나는데 그런 날은 결국 알바(분명 직원으로 계약했지만... 모집 공고도 알바, 그래도 내 기분도 알바) 가기 전에 반드시 낮잠을 잤기 때문에 덕분에 수면시간이 엉망진창이 된다. 

보통 일어나면 12시 쯤 되는 것 같다. 나의 계획은 분명 8시간 일하고 8시간 자고 8시간 내 시간...이었을텐데 말이다. 4시 출근이니 3시부터는 준비한다. 늦은 밥을 후딱 먹고 샤워를 한다. 1시 넘어가면서부터 스트레스 받기 시작하고, 2시 쯤 되면 '하............... 가기 싫어.................'가 되어 아무 것도 못 하고 그저 휴대폰만 만지작 거리거나 잠시 잠을 자곤 한다. 내 시간이라는 게 어쩌면 8시간 가까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돌아와서 밥 먹고 씻고 휴대폰 좀 만지다 보면 2시간을 사용한 2시가 되어버린다. 대대적인 정비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아직은 일에 익숙해져 몸이 덜 피곤해질 때까진 아무 것도 바꾸고 싶지가 않다. 

일은- 사실 일 자체의 난이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다만 압박과 스트레스가 커 이걸 계속 해야하나, 그냥 피씨방으로 돌아가고 싶다- 동네에 다른 피씨방에서도 사람 구하던데- 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 압박과 스트레스는 사실 손님들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고, 엄청 꼼꼼하며 때문에 잔소리 많다고 하는 사장님과 그런 사장님에게 잔소리 듣기 싫으면 제대로 하라고 전쟁 중 폭격처럼 잔소리를 쏟아내는 교육자들이 원인이다. 

하는 내내 일본에서의 알바 생활들이 떠오른다. 하루도 안 떠오른 적이 없는 것 같다. 마츠야든 세븐일레븐이든. 그 지분이 65%가 마츠야, 25%가 세븐일레븐, 10%정도가 오오에도온천의 스시집인 걸 보면, 아마 내 마음 속의 지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카레집이나 오코노미야키 가게 같은 애정도 안 붙고, 시달리다가 떨어져 나온 가게들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심지어 하루에 두 번 정도 테이블 닦으러 나갈 때 마저도 떠오르는 것은 고작 2달 일한 종로의 이자카야다.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은 마츠야에서 후배들 교육하던 것과 세븐에서 상품 진열品出し과 フェイスアップ라고 하는 재진열, 정리이다. 내가 처해있는, 그리고 하고 있는 일이 겹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모두에게 분명 좋은 선배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배들의 신뢰로 중간 정도의 위치였던 내가 신인 교육을 맡아 했고, 내가 했던 말들, 그리고 언제나 나의 말에 웃으며 はい!^^라고 대답하던 후배인 하루카짱나 료-코씨, 친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첫 날, 내게 교육받은 것에 고맙다며 내 송별회에 참석해준 아베쨩, 나는 후배들에게 좋은 선배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내게 보여준 표정들이 그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여기엔 적지 않겠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주일이 되었는데 왜 이것밖에 못 하냐, 왜 아직도 못 하냐- 라는 말들이 들려온다. 물론 빵집 일이 단순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일단 주업무에 마감, 정리가 있기 때문에 머리로도 외우고 몸으로도 익혀야 하는 부분이 많은데, 그게 일주일만에 되는 일인지 몰랐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러한가보다? 그럼 나이제한을 두지 나이제한은 40세 이하까지로 써놓고 나이는 상관 없다고 했으면서. 나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훨씬 시간이 오래 걸렸을텐데. 계산이든 뭐든 일단 경험자라서 빨리 익히고 있는 것도 사실인데 그것은 보이지 않나보다. 앗, 여기엔 적지 않기로 했지. 나는 '좋은' 선배였다니까.

학교에서든 이전 알바들에서도 늘 내가 나이가 많기 때문에 내가 먼저 다가가려고 노력하지만, 상대방의 표정에서 '적극적으로' 나를 불편해하고 거부하는 것을 감지하면, 나도 힘들고 지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말 걸고 다가가려 노력한 것이 7일째 되던 어제, 조금 한계가 왔다고 생각했다. 집에 가면 언니한테 엄청 씹어대곘지.(자매가 함께 일하고 있고, 이번에 동생이 그만두며, 그래서 동생이 주로 교육을 맡아서 한다)

내 경우엔 사고 방식이나 서비스의 やり方가 이미 많이 일본쪽(특히 마츠야, 세븐일레븐 중심)으로 기울어져있고 그것이 바뀔 환경도 조건도 조성되지 않았던 2년 반이었기 때문에, 한국 스타일이 여엉 이해하기 힘들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일단 그렇게 하라니까 정신과 마음을 비우고 껍데기만 유지한 채로 일을 하고 있지만, 내가 다운그레이드 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동시에 한국사람들에 대한 이질감?도 점점 커진다. 고마워할 줄도 미안해 할 줄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칭찬할 줄도 모르며, 심지어 교육, 조언, 충고하는 방법 조차도 모른다. 이건 개인차가 있겠지만 상대방의 미성숙함에 상처받는 게 내가 되는 것이 싫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회성 부족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자체가 낮은 것을 내가 나이가 많기 때문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돌리는 것은 거절하고 싶다. 내가 나이 많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나이 많은 사람'을 대하는 능력이 없는 것 뿐이다. 정작 나는 나이가 많다고 대접 받고 싶다느니,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말 놓을게/놓아도 되지?"따위를 말하는 등, 한국 사회가 가장 중요시 하는 요소 중 하나인 "'나이'에 의한 서열화"자체가 머릿 속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나이가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나의 탓이 아니라 너의 탓이라고 하고 싶다. 나는 1억 2천 명 중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이방인으로서 그 속에서 살아가고,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나이, 국적, 성별에 관계 없이 사람을 대하는 것에 철저하게 그리고 지독하게 훈련되고 나 역시 나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어왔다. 나도 낯가리는 성격이기 때문에 사적인 자리에선 적극적이거나 밝지는 못하지만, '일'의 경우엔 가식적으로 느낄 지 몰라도, 낯 가리는 나는 잠시 넣어두고, 밝게 일하는 나를 꺼낼 수 밖에 없다. 일은 일인 거고, 그리고 일은 일일 뿐이다.

다른 한 명인 언니는 "낯을 가리는 편이라서요"라며 교육을 하려 하지 않는다. '일'이 되면 계속 낯가림 있어요~ 드립을 할 수 없으니, 낯 가리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노력하는 것일 뿐이다. 과 행사 등의 단체로 모이는 경우에 나의 낯가리는 성격은 밖으로 나온다. 일도 아니니 굳이 최대한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적당히 상대방이 불편해 하지 않을 정도로만 노력한다. 나는 낯 가리는 성격이기 때문에 노력을 하는데 왜 상대방은 낯 가리는 성격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진심으로 보통의 한국 사람들과는 공생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고, 그래서 해외로 나갔을 때 너무나도 마음 편히 잘 살았고, 다시 돌아와서도 삐걱거리는 잡음만 있는 것을 보면, 나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만 교제가 가능하고, 보통의 한국인들과는 잘 지내지 못하는 것이 이제는 노력 조차도 쓸 모 없는, 극복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2시가 넘어갔다 하... 2시병 생기게 생겼음. 

글 다 쓴 게 2시 반이라니.....ㅋㅋ 아 나의 1시간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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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간다'보다는 '어떻게 지내는가'가 더 문제이긴 하다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을테고 생각만큼 수월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부터 일을 시작한다
집 앞의 프랜차이즈 빵집(ㅍㄹㅂㄱㅌ)인데 그냥 생활의 일부가 되겠지.


내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로 생각중이다
대만도 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만 30세라는 제한된 시점까지 남은 시간은 매일 줄어만 간다
근데 얼마 전에 독일내 워킹홀리데이 비자의 노동시간 제한이 생겼다
풀타임 90일이상은 불가라니..! 차라리 일반 여행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 없어 없어... 
근데 미니잡(월 450유로)이나 미디잡(월 800?850?유로)은 상관 없는 듯 하다
어차피 애초에 정식 취업이나 인턴이 아닌 찔끔찔끔일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자는데 지진이 있었다 
일어났었지만 꿈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대충 1.5~2정도 되겠구나- 하고 다시 잠들었다
일어나서 페북 보고서 그게 정말 현실세계의 지진이었다니! 하고 놀랐지만.

ㅃㅂ빵 이름이나 외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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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주소를 바꿨다
어차피 ㄱㅎ도 링크로 해두었으니 저절로 바뀐다고 했고.
여기 오는 사람은 ㄱㅎ 그대 한 명 정도이니ㅋㅋㅋ

그동안 콜플의 픽슈 가사를 따서 주소로 썼었는데
그 가사 검색으로 유입되는 게 너무 많아서 그냥 바꿔버렸다 

티스토리에겐 사실 딱히 불만은 없는데
큰 불만 중 하나가 검색 제한이 안 된다
완전 오픈은 둘째치고 일단 검색 유입을 금지 시키고 싶지만.... 

감상 블로그 쪽의 검색어는 더 그지같다
생명보험, 원자력.........
도대체 이런 말들을 내가 언제 쓴 거야?? 싶을 정도의 단어들.
다음에서 이상한 검색들로 들어오고 있다
제발 검색 안 됐으면 좋겠다 정말..... 


Posted by mosa. :
요즘 영화 보고 네이년 블로그에 영화 감상 쓰면서 챌린지 위젯 네모칸 하나씩 지워가는 것이
이 건조한 싦의 몇 안 되는 낙 중 하나였는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감상을 네이년이 제멋대로 날려버렸다
다른 브라우저 창에 갔다가 돌아오면 날아가버리는 거다
저번에 <노예 12년> 쓸 때도 그랬는데..
그래도 그땐 자동 임시저장이 되어있어서 2~3줄 날려버리는 것으로 끝났지만,
어제는 왜 자동임시저장도 안 되어있는 거지? 

매우 깊게 빡쳐서 네이년을 그만두기로 하고
티스토리의 블로그로 옮겼다
최대 개설 가능 5개 중 그나마 포스팅이 없는 블로그로.

consistently-inconsistent
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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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잘 찍는 미술 전공자는 의외로 드물며
그림을 잘 그리는 사진작가는 더 드물다
둘 다 하는 게 건축쪽 사람들.

하지만 건축쪽 사람들의 사진은 좋아하지 않는다
건물과 조경이 늘 돋보여야 하기 때문에
사진 속에 사람은 없고 멋져 '보여야 하는' 건축물만 있다
사진들이 인간 냄새 없이 하나같이 차갑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으면 죄다 0과 1로 느껴진다

나는 미술 전공자들의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미술 전공자들의 사진의 특징은
유난히 사진에 자신들의 무언가를 담기 위해 '연출'을 하는데 그게 뭔지 무지한 나는 알기 힘들 때가 많다
일반 사진가들이 찍는 사진은 알겠는데 말이다.
순수미술, 현대미술이 대중에게서 멀어지는 것과 같을 테다
사진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와 사진을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는 수단으로만 사용한다
사진이 작품인 게 아니라 미술 작품을 사진기로 찍은 것 같은.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사람 바이 사람.

그림을 잘 그리는 사진가?
원래 그림을 하던 사람이 사진을 더 잘하게 된 케이스겠지.

나는 그 어느 것도 전공자는 아니지만
그림도 잘 그리고 사진도 잘 찍는 보통 사람이 되고 싶다

사진 보정의 제1순위는
색감 보정이 아닌 수직수평 보정이다

휴대폰으로 찍어 어플로 보정을 하든
카메라로 찍어 포토샵으로 보정을 하든
파일을 불러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수직수평 맞추기.
그 다음이 크롭.
그리고 나서 밝기 수정.
여기까지가 내 기본 보정이고 색감 보정은 어디까지나 선택.

색감이 쨍~~한 사진은 좋아하지 않는다
일부러 기울인 것도 아니고 그냥 수직수평을 고려하지 않은 것일 뿐인 사진은 아무리 사진과 피사체가 예뻐도 스킵이다

잘 찍은 사진은 사진 자체에 대해 코멘트를 받고
그저 그런 사진은 피사체에 대해서만 코멘트를 받는다
Posted by mosa. :
오랜만에 티스토리 블로그로 돌아와
예전 일기들을 읽어보았다

마츠야의 미나미에서 홍고로 이적할 당시의 기록이 남아있었다
당시의 기분이 느껴진다ㅋㅋ
타카츠의 이야기도 있었다

아마 3년은 기억 속에 봉인한 일일텐데
다시 보니 떠오른다
아마 그때 타카츠는 내 기분을 이해해주었던 것 같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고이는 걸 보니
보나마나 나는 류상을 응원한다, 류상 편이다ㅡ 이런 말을 했을테다
이것이 기억의 날조든 뭐든
타카츠가 일본에서 가장 멋진 남자 1위라는 거엔 변함이 없다

호리에는 이적 이야기로 상당히 내게 삐쳐있었다
마지막엔 쳐다도 안 보고 말도 안 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도.
그러고보면 송별회나 그 이후 호리에가 일하는 곳(지금은 없어짐)에 놀러가는 등 나중엔 풀어진 걸 보면 녀석도 속상했으리라 생각한다
한 마디 상의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었다
3년 반을 동고동락 했는데 말이다

일기 좀 열심히, 자세히 쓸 걸 그랬다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게 일기밖에 없다
타카츠도 호리에도 이젠 몇 살이지?
처음 만난 게 고1이었는데ㅡ
내가 돌아오던 해가 이미 20이 되는 해였으니
한국나이로도 20 중반이겠구나ㅡ
하긴 나도 22살에서 29살이 되었다ㅋㅋㅋㅋㅋ

보고 싶다
날 보고 싶어 해주지 않아도 좋으니
잊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동생들.
Posted by mosa. :
선생님과 내일 상담하기로 했다
내가 지금 듣고 있는 starter는 2달 과정으로
나는 두 번째 달에 들어온 상태인데
다음 달에 첫 번째 달 수업을 듣지 않고
윗반인 racer로 가고 싶기 때문이다

첫번째달 발음 교정이 있기 때문에 아쉽지만
아무래도 나의 성향을 생각하면
다음 달엔 늘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나는 생존이 달린 극한의 상황에 처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썩어빠진 정신상태를 가진 사람이다
일본어를 빨리 익힐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먹고 사는 것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고
다들 알다시피 일본 가기 전엔 일본어도
듣기도 잘 못 하고 단어도 아는 게 몇 개 없었다
그저 적당히 외운 문법과 수다스러운 주둥이만 갖고 갔었지
일본어 뿐이겠는가.

내가 고3의 1년 포함,
고등학교 내내 공부를 안 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수능 1주일 전까지 매일 밤 늦게까지 컴퓨터하면서 놀았고
그 1주일조차도 나는 재수 하겠다며 야자시간에
친구들의 더 이상 안 볼 문제집을 얻으며 돌아다녔다
수험 공부는 애초에 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입시라는 모두에게 절박한 상황조차도
내겐 그저 지루하고 갑갑하여
나는 오직 수능를 위한 공부를 한 적이 없었다

대학 시즌1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에서 처음으로 성적을 잘 받기 위해 공부하고
과제와 공부를 위해 밤을 샜었다
절박했으니까. 유학 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장학금이.
장학금 못 받았을 때의 상황은 지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또한 '뭐든 잘 하는 류'라는
오직 나만 가질 수 있는 타이틀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엔 영어를 위해ㅡ
나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고 싶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나의 몸과 머리와 마음이 알고
스스로 이 무거운 엉덩이를 떼어 일어날 수 있도록.
다음 달은 이번 달보다 느슨할테니
나는 분명히 나태해 질 것이다
의지? 가 나의 게으름을 이길 수 없다
나의 게으름을 이길 수 있는 건 오직 극한의 상황 뿐이다

내가 일본에서 얼마나 부지런히 살았는지 다들 알지 않는가
전기 가스 휴대폰 모두 미납으로 끊겨도 봤고
정말 가진 돈이 100엔 밖에 없었던 적도 있었다
이 정도의 극한이 되어야 비로소
알바도 여러 개를 꾹꾹 눌러서 하는 거다

며칠 전에 왜 영어 공부를 하냐고 물었다
다들 시험, 스펙, 해외에 나가고 싶다ㅡ 등을 대답했다
내가 지금 갑자기 수 년 동안 던져놓았던 영어를
갑자기 집어든 이유는ㅡ
일본어 비전공자이며 일본에서 직무 경력이 없는
나의 일본어가 빛이 나려면 영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1월 말에 모 일본 대기업 상사에서 공개 채용이 있었는데
영어 일본어 모두 필수였다
게시판에 문의하는 지원자들은 대부분이
일본에서 상경계열 대학을 졸업.
일본어는 다들 비슷 비슷 할테니 경쟁력을 영어에서 올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 회사 뿐만 아니라 어디든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고.

그리고 호주 워킹을 접은 만큼
다른 어디선가에서 영어가 얻어져야 했다
영어가 되어야만 유럽이든 어디든 갔을 때
내가 원하는 것들을 좀 더 수월하게 이룰 수 있게 된다

영어 노래를 들으며 그 뜻을 그대로 느끼고 싶었고
영어 영화를 자막 없이 보고 싶었다
(이건 영화관에서 일본영화를 보며 느꼈다 자막의 한계.)

아직 윗반 갈 실력은 안 되는 것도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한 달 더 있는다고 해서 그 실력이 갖춰지지는 않을 것 같다
아주 오래 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미 하나의 외국어를 익힌 사람은 어느 언어를 배우든 자신만의 학습 방법을 알기 때문에 쉽게 배울 수 있다고.
처음 한 달은 일단 무거운 엉덩이 떼는 데에 걸리는 시간일테니 꽤 많이 힘들어하겠지만
이 게으른 엉덩이를 떼어내어 제대로 서게 된다면
누구보다도 빨리 앞으로 나아갈 자신이 있다

얘기가 잘 되어야 할텐데 말이다
승급 시험도
하나는 시간이 안 맞아서(왜 자꾸 화실 가는 날 하는데ㅠㅠ)
하나는 1개 차이로 틀린 거(150개 요소 중 4개 틀림, 커트라인이 3개ㅠㅜ) 재시험 안 본 게(마음이 따르지 않았다) 있긴 하지만...

티스토리 앱이 이정도만 잘 되어있어도
웬만한 것들은 모두 티스토리의 원래 일기장에 쓸텐데
앱이 여엉 좋지 않다

찾아보니 있길래 옮겨옴
Posted by mosa. :
이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날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게다가 올 연휴도 또 설날에 겹쳤어. 한 두 번이 아니니까. 

알바하면서 쭈욱 적어보았다 그리고 비교적 짤막하게 결론을 내렸지.
뭔가 이것 하고 싶어 저것 하고 싶어 보다는 현실적인 바람들로.



이 재미도 없고 즐거움도 없고 의욕도 없는 무기력한 삶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는 날들이 그만 이어지기를.
취직, 결혼 이런 거 말고, 그냥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한 번 쯤은 누군가의 품에 안겨 온 몸의 수분을 눈물로 쏟아낼 수 있기를.
내 심장에 날개가 돋아, 마음이 늘 자유롭기를. 
지금이 너무 너무 재미 없으니까 29살의 한 해는 좀 재미있기를.


이 세상에서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자신自信과 용기를 주세요
Posted by mos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