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할머니
어제 아침에 할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오셨다. 시골의 큰엄마가 아프셔서 서울에 올라와계시는 동안에 엄마가 할머니 돌봐드리러 잠시 내려갔다가 계속 제천에서 돌봐드릴 수가 없어 아빠와 함께 모시고 오기로 한 것이다. 아침에 할머니가 30분 후에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예전에 시골집에서 제천 시내로 차 타고 이동하셨을 때에 멀미가 심하게 나셔서 한참을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제천 할머니 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건 막내 고모인데, 막내 고모도 다음 달 환갑인 아빠와 8살 차이로, 내일 모레 70을 바라보는 나이이니, 아무리 딸이라고 해도 할머니를 돌봐드리기는 벅찬 것이다. 결국 집안의 가장 젊은 멤버인 엄마와 아빠에게 할머니의 보필 역할이 지어진 것이다.
할머니는 의외로 괜찮으셨다. 문제는 하루가 지난 오늘. 아침에 드신 미역국이 몸에서 소화를 못 시켰는지, 정오가 지나자 토하시기 시작했고, 나는 그 이후 알바 다녀왔고, 자정에 집에 돌아오니 엄마 말에 의하면 할머니가 계속 아프셔서 한 바탕 난리였단다. 지내고 계신 남동생 방에 대변이 마구 산재해있고(100살 넘은 노인이 배변을 젊은 사람들처럼 컨트롤하긴 힘들다), 내가 돌아왔을 때에도 누워계시던 할머니는 일어나 갑자기 모두 토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아프신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계속 신음 소리를 내셨다. 혀가 입 밖으로 나와있어 행여 숨이 멎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계속 숨을 쉬고 계신지 나도 모르게 확인하고 있었다.
늘 옷 속에 가려져 있었던 할머니의 가슴팍을 보게 되었다. 그 누구도 본 적 없을- 인간의 피부가 이렇게 주름이 많이 생길 수 있다니... 싶을 정도였다. 아마 할머니의 온 몸이 주름으로 덮혀져 있을 것이다. 할머니의 100년 넘은 피부 조직들은 탄력은 물론 색도 잃어 거무튀튀하게 변해있었다.
죽음과 너무나도 가까이 있지만, 할머니는 늘 생과 더 가까이 있다.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최근까지도 내게 할머니는 영생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만난 할머니는 당신의 마지막 날을 향해 좀 더 가까워 진 듯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잠들었다가 눈을 뜨지 못할수도 있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닥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더욱 커졌고, 할머니가 당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곳에 있다는 점도, 언젠가는 반드시 올 그날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다시 제천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제천으로 돌아가신다고 해도 이전과 같은 몸상태로 매일을 보내실 수 있을까. 큰엄마가 몸이 괜찮으셨다면 할머니의 삶은 좀 더 길어질 수 있었을테다. 등등... 할머니와 함께 하는 이 순간이 소중하고, 동시에 매우 큰 불안감이 내 안에 가득하다.
괴로워하는 할머니를 보고난 후, 방으로 들어와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사랑이의 애교를 보면서도 웃음이 지어지질 않는다.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의 깊게 가라앉은 마음이 아주 조금 느껴졌다.
사실 할머니 다음으로 걱정되는 것은 엄마이다. 작년 말 외할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후, 병원 생활을 마치고 댁으로 돌아오셨지만, 움직이지도 말도 못하시기 때문에 혼자서는 생활이 불가능하여, 간병인을 한 분 두고, 엄마, 두 삼촌, 두 외숙모가 일주일에 1~5번씩 번갈아가며 할머니를 돌봐주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엄마대로 외할머니의 일 때문에 힘든데, 할머니까지 신경쓰게 되었으니 말이다. 엄마가 정이 많고 시어머니인 할머니를 잘 따른다는 점도 할머니를 가까이에서 대하며 엄마가 알게 모르게 속으로는 상당히 많이 슬퍼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 죽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죽지 않는 인간은 없다. 나도, 나의 가족도, 나의 몇 안 되는 친구들도, 모두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100년 안에 사라질 것이다. 다음의 14년인 2114년은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이건 절대 변하지 않을, 아주 절대적인 진리이고 진실이다.
인간의 삶은... 초반엔 많은 만남들로, 후반엔 많은 헤어짐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과 영원한 이별을 하면서도 자신의 삶은 살아가야만 하고, 사는 내내 떠나는 것을 바라볼 뿐이며, 그리고 가장 마지막의 이별은 자신이 세상과 남은 사람들에게 고하는 이별, 드디어 본인이 떠나는 것. 어쩌면 나도, 만남만큼 헤어짐이 많을 나이에 접어든 느낌이 든다. 내 나이는 더 이상 절대적 젊음(20대)이 아닌 상대적 젊음이 되어버렸고, 이제는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가는 이별의 행진이 시작되는 것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나도 모르게 하고 있다. 참으로 이기적인 것이, 그래도 그 행진의 첫 걸음이... 나의 직접적인 가족이 아니길 바라게 된다.
3. 삶
어젠가, 그 '잘 가는 커뮤니티'에 '당신들은 왜 사냐, 왜 일하냐'라는 질문의 글이 올라왔다. 많은 글들에 나의 의견을 코멘트로 달곤 하는데, 그 글에는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 않아 답글을 달지는 않았다.
나의 부모가 내게 생명을 주었다. 한 부부의 첫 아이로, 잉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었을테고,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세포분열하며(!) 성장하는 나를 보며 수 많은 나의 미래를 꿈꾸었을테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부터 나 자신에 대한 고집이 생겼고, 나의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조종해가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기 위해 내 삶을 조종하는 키를 잡고 움직이며 놓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는 것인가.
부모가 생명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지 못해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뭐하러 고생하며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인지 말이다.
인간의 삶은 한 편의 영화, 드라마와도 같아, 끝이 분명 존재하지만, 끝난 후에도 분명 관객에게 작고 큰 영향을 미쳐,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한 누군가는 또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그렇게 인간은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끝이 존재한다고 해서 과정이 의미가 없다고 할 순 없다. 인간의 삶의 결과는 누구나 죽음이다. 절대 절대 절대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결과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무엇으로 물들이고 채웠는가-는 각자의 삶을 자신 스스로가, 혹은 타인이 평가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내가 아주 단순하게, 대략적으로 내린 결론을 말하자면.
내가 사는 이유는 말이다-
"내게 생명과 삶과, 그리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의 존재가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모두가 얽히고 설킨 유기적인 세상에서, 이 세상이 아주 조금이라도 인간의 정신이 풍족하고, 올바른 세상으로 정화되어 가는 것에 먼지만큼이라도 일조하고 싶다."
언젠가 백지였던 나의 삶이 내가 원하는 그림들로 채워져, 내 삶에서 가장 큰 이별을 하는 순간, 그 삶이 짧든 굵든, "만족스럽게 잘 살다 간다"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고 싶다.
그렇게 내 삶의 마침표를 예쁘게 찍고 싶다.
그리고 언제 눈을 감아도 예쁜 마침표를 찍을 수 있도록.
4. 리스트
내 삶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쭈욱 적어보았다
1997년 3월 외할아버지
2000년 2월 관계를 정의하기엔 애매한, 엄마의 사촌오빠인 줄 알았는데... 일단은 외삼촌
2000년대 초반 시골 큰아버지(아빠의 첫째 형)
2009년 9월? 관우네 엄마
2011~2012년 화곡동 아저씨(이모-엄마와 의자매-의 아버지로, 나를 무척 예뻐해주셨다)
2013년 12월 사망소식을 뉴스로 접한 민태씨
늘 말하지만, 나는 내 삶 29년 4개월동안 장례식장에 간 경험이 한 번도 없다
어제 아침에 할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오셨다. 시골의 큰엄마가 아프셔서 서울에 올라와계시는 동안에 엄마가 할머니 돌봐드리러 잠시 내려갔다가 계속 제천에서 돌봐드릴 수가 없어 아빠와 함께 모시고 오기로 한 것이다. 아침에 할머니가 30분 후에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예전에 시골집에서 제천 시내로 차 타고 이동하셨을 때에 멀미가 심하게 나셔서 한참을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제천 할머니 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건 막내 고모인데, 막내 고모도 다음 달 환갑인 아빠와 8살 차이로, 내일 모레 70을 바라보는 나이이니, 아무리 딸이라고 해도 할머니를 돌봐드리기는 벅찬 것이다. 결국 집안의 가장 젊은 멤버인 엄마와 아빠에게 할머니의 보필 역할이 지어진 것이다.
할머니는 의외로 괜찮으셨다. 문제는 하루가 지난 오늘. 아침에 드신 미역국이 몸에서 소화를 못 시켰는지, 정오가 지나자 토하시기 시작했고, 나는 그 이후 알바 다녀왔고, 자정에 집에 돌아오니 엄마 말에 의하면 할머니가 계속 아프셔서 한 바탕 난리였단다. 지내고 계신 남동생 방에 대변이 마구 산재해있고(100살 넘은 노인이 배변을 젊은 사람들처럼 컨트롤하긴 힘들다), 내가 돌아왔을 때에도 누워계시던 할머니는 일어나 갑자기 모두 토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아프신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계속 신음 소리를 내셨다. 혀가 입 밖으로 나와있어 행여 숨이 멎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계속 숨을 쉬고 계신지 나도 모르게 확인하고 있었다.
늘 옷 속에 가려져 있었던 할머니의 가슴팍을 보게 되었다. 그 누구도 본 적 없을- 인간의 피부가 이렇게 주름이 많이 생길 수 있다니... 싶을 정도였다. 아마 할머니의 온 몸이 주름으로 덮혀져 있을 것이다. 할머니의 100년 넘은 피부 조직들은 탄력은 물론 색도 잃어 거무튀튀하게 변해있었다.
죽음과 너무나도 가까이 있지만, 할머니는 늘 생과 더 가까이 있다.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최근까지도 내게 할머니는 영생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만난 할머니는 당신의 마지막 날을 향해 좀 더 가까워 진 듯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잠들었다가 눈을 뜨지 못할수도 있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닥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더욱 커졌고, 할머니가 당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곳에 있다는 점도, 언젠가는 반드시 올 그날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다시 제천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제천으로 돌아가신다고 해도 이전과 같은 몸상태로 매일을 보내실 수 있을까. 큰엄마가 몸이 괜찮으셨다면 할머니의 삶은 좀 더 길어질 수 있었을테다. 등등... 할머니와 함께 하는 이 순간이 소중하고, 동시에 매우 큰 불안감이 내 안에 가득하다.
괴로워하는 할머니를 보고난 후, 방으로 들어와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사랑이의 애교를 보면서도 웃음이 지어지질 않는다.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의 깊게 가라앉은 마음이 아주 조금 느껴졌다.
사실 할머니 다음으로 걱정되는 것은 엄마이다. 작년 말 외할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후, 병원 생활을 마치고 댁으로 돌아오셨지만, 움직이지도 말도 못하시기 때문에 혼자서는 생활이 불가능하여, 간병인을 한 분 두고, 엄마, 두 삼촌, 두 외숙모가 일주일에 1~5번씩 번갈아가며 할머니를 돌봐주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엄마대로 외할머니의 일 때문에 힘든데, 할머니까지 신경쓰게 되었으니 말이다. 엄마가 정이 많고 시어머니인 할머니를 잘 따른다는 점도 할머니를 가까이에서 대하며 엄마가 알게 모르게 속으로는 상당히 많이 슬퍼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 죽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죽지 않는 인간은 없다. 나도, 나의 가족도, 나의 몇 안 되는 친구들도, 모두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100년 안에 사라질 것이다. 다음의 14년인 2114년은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이건 절대 변하지 않을, 아주 절대적인 진리이고 진실이다.
인간의 삶은... 초반엔 많은 만남들로, 후반엔 많은 헤어짐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과 영원한 이별을 하면서도 자신의 삶은 살아가야만 하고, 사는 내내 떠나는 것을 바라볼 뿐이며, 그리고 가장 마지막의 이별은 자신이 세상과 남은 사람들에게 고하는 이별, 드디어 본인이 떠나는 것. 어쩌면 나도, 만남만큼 헤어짐이 많을 나이에 접어든 느낌이 든다. 내 나이는 더 이상 절대적 젊음(20대)이 아닌 상대적 젊음이 되어버렸고, 이제는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가는 이별의 행진이 시작되는 것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나도 모르게 하고 있다. 참으로 이기적인 것이, 그래도 그 행진의 첫 걸음이... 나의 직접적인 가족이 아니길 바라게 된다.
3. 삶
어젠가, 그 '잘 가는 커뮤니티'에 '당신들은 왜 사냐, 왜 일하냐'라는 질문의 글이 올라왔다. 많은 글들에 나의 의견을 코멘트로 달곤 하는데, 그 글에는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 않아 답글을 달지는 않았다.
나의 부모가 내게 생명을 주었다. 한 부부의 첫 아이로, 잉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었을테고,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세포분열하며(!) 성장하는 나를 보며 수 많은 나의 미래를 꿈꾸었을테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부터 나 자신에 대한 고집이 생겼고, 나의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조종해가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기 위해 내 삶을 조종하는 키를 잡고 움직이며 놓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는 것인가.
부모가 생명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지 못해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뭐하러 고생하며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인지 말이다.
인간의 삶은 한 편의 영화, 드라마와도 같아, 끝이 분명 존재하지만, 끝난 후에도 분명 관객에게 작고 큰 영향을 미쳐,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한 누군가는 또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그렇게 인간은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끝이 존재한다고 해서 과정이 의미가 없다고 할 순 없다. 인간의 삶의 결과는 누구나 죽음이다. 절대 절대 절대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결과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무엇으로 물들이고 채웠는가-는 각자의 삶을 자신 스스로가, 혹은 타인이 평가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내가 아주 단순하게, 대략적으로 내린 결론을 말하자면.
내가 사는 이유는 말이다-
"내게 생명과 삶과, 그리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의 존재가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모두가 얽히고 설킨 유기적인 세상에서, 이 세상이 아주 조금이라도 인간의 정신이 풍족하고, 올바른 세상으로 정화되어 가는 것에 먼지만큼이라도 일조하고 싶다."
언젠가 백지였던 나의 삶이 내가 원하는 그림들로 채워져, 내 삶에서 가장 큰 이별을 하는 순간, 그 삶이 짧든 굵든, "만족스럽게 잘 살다 간다"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고 싶다.
그렇게 내 삶의 마침표를 예쁘게 찍고 싶다.
그리고 언제 눈을 감아도 예쁜 마침표를 찍을 수 있도록.
4. 리스트
내 삶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쭈욱 적어보았다
1997년 3월 외할아버지
2000년 2월 관계를 정의하기엔 애매한, 엄마의 사촌오빠인 줄 알았는데... 일단은 외삼촌
2000년대 초반 시골 큰아버지(아빠의 첫째 형)
2009년 9월? 관우네 엄마
2011~2012년 화곡동 아저씨(이모-엄마와 의자매-의 아버지로, 나를 무척 예뻐해주셨다)
2013년 12월 사망소식을 뉴스로 접한 민태씨
늘 말하지만, 나는 내 삶 29년 4개월동안 장례식장에 간 경험이 한 번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