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마구 휘몰아치게 진행시키고 있는 감이 없잖아 있다
나 스스로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진행한다는 점은 느껴지지 않고,
마치 영화 시작 20분 전까지 취소 가능한 영화 예매하고 자는 기분으로 비행기를 예매했다
날짜도 마구 정했다
골라놓은 날짜 5일과 10일 중에서
5일은 도착하면 바로 주말이라는 이유(일본에 간 날은 금요일이었고, 나는 이틀 동안 손가락만 빨았다) 때문에
바로 10일로 결정, 예매.
예전에 키요세 집을 구할 떄,
너무 머리 아프고 귀찮은 나머지 집을 그냥 질러버렸더니, 엄마였나 여동생이었나가
'너무 생각 없이 지르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번 호주 건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크게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진지하게 준비한 것이 아닌 만큼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또 이렇게 해야된다고 생각한다
남들처럼 긴 시간 준비한 게 아니다
8월 말, 이미 호주로 가기로 정한 상태였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온 한국 생활에 대한 스트레스, 하루라도 빨리 '내가 이곳을 떠난다'라는 걸 증거를 만들어야만
내가 마음이 편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나는 이제 한국에서 그만 살고 싶다.
사람들과 사회에게 받는 스트레스도 크고,
무엇보다도 서른이라는 1년을 두고 생각해 보았을 떄, 아무 것도 안 한 것만 같아,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 자체가 아깝다라는 생각을 하니,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단 두 달이라도 꿈틀대기라도 해서 이 1년을 그냥 시체처럼 지냈다는 오명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알바-백수를 반복했던 21, 22, 23의 반, 이 2년 반의 시간이 나는 무척 아깝고 아쉽다
좀 더 농도 있게 살았으면 좋았을텐데-라고.
물론 당시에는 마음 껏 뒹굴거리고, 책도 많이 읽었던 시절이라 딱히 100% 후회되는 건 아니지만,
그 시절을 늘어지게 보냈다는 것이 두고 두고 아쉽다
그러다보니 똑같은 시간을 나이 서른에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
내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나누고 싶지 않지만, 한국에 돌아와 새로 사귄 사람들과 그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반응이 확연히 갈린다
새로 사귄 사람들은 친하든 안 친하든 한국 특유의 오지랖 걱정을 발사해준다
'결혼해야하지 않냐, 너도 니 인생을 준비해야하지 않냐' 등의 서로의 인생에 하나 영양가 없는 명절st의 질문들.
정말 신기한 게 나와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 가족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이미 포기한 상태인 걸까.
2011년 3월 지진 직전에 여동생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놀러왔었다(지진 맞고 바로 귀국)
여동생과 함께 이케부쿠로 선샤인시티 지하의 오코노미야키 가게에서 함께 식사를 할 때, 여동생이 말했다
"엄마랑 나는 그냥 언니가 뭘 하든 냅두기로 했어ㅋ 언닌 그래야 하는 사람이야ㅋ 엄마랑 언니는 그냥 일본에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했어ㅋㅋ 언니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ㅋㅋ"
이번 호주 건도 엄마에게만 넌지시 말하고 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아마 페이스북으로 보고, 엄마에게 물어보는 정도일테다
여동생은 호주 워킹 건에 대해 처음으로 코멘트를 했다(페이스북에)
"내 생일선물 안주려고 튀는건아니지??ㅎㅎ 호주에서 보내주려고 그런거지??ㅎ"(여동생의 생일은 11/12이다)
가족은 내게 장녀로서의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인생을 산다
풍족하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았던 가정환경에서,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지원해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주었다
지원해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을 때, 우리 삼남매는 각자 알아서 각자의 방법으로 해결했고,
부모님이나 형제가 서로에게 이를 못하게 하거나 한 적도 없다
난 이점이 무척 고맙다
친구들,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마운 것은, 내게 저 오지랖 걱정을 펼치며 말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애초에 한국 생활은 길지 않고, 다시 출구할 것이라고 못을 박고 시작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 명 쯤은 '그래도...'라면서 말릴 법 하건만, 말리기는 커녕 많은 응원을 받고 있다
특히 호주행은 지난 겨울, 지인의 예상치 못한 사망으로 취소했다가 재개하는 만큼,
다들 그러려니- 하는 듯 하다.
근데 사실,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응원인지 모를테다
거기다 '대놓고 응원'해주면, 그 응원에 힘입어 발을 동동 구르다가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
하고 싶은 것은 많다
거주형태는 쉐어가 될테고, 한국인을 제외한 아시아인, 유럽인 등이었으면 좋겠다
한국인, 미국인은 피하고 싶다
일은 기왕이면 스시 레스토랑에서 하고 싶다
매일 스시 먹고 싶다 몸에 방사능은 쌓여가겠지만 아이 돈't 케어.
와따시와 스데니 호-샤노-노 카타마리다제.
기왕이면 시티쪽에 살고 싶다
가서 사진을 많이 찍고 싶다(사실 머리 속엔 이 생각 뿐이다)
돌아다니면서 사진 많이 찍어야지
가볍게 그림도 그리고 싶다
언젠가는 책 내고 싶으니까(....) 결과물 공개는 해야지.
페이스북 페이지는 '긍정적인' 사진들로만 올릴 예정. 텍스트는 최소화하고.
텍스트의 경우엔 네이버 블로그 전체공개+페이스북 친구공개를 이용할까 한다
페이스북은 노출도와 전파력이 높은 매체이다
굳이 불특정 다수의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을 공유하고 싶은 것은 내 주변 사람들 뿐이다
불특정 다수에게는 '좋아요'를 많이 눌러줄 법한 적당한 예쁜 사진 정도로만.
포장할 건 해야지. 포장 안 된 속살은 내 주변에게만.
외국 생활이 마냥 좋을 수 만은 없다
일본 생활도 지금 그 상황이 아니니까 좋았다 그립다 하는 거지,
사실 당시에는 시궁창이 따로 없었고, 매년 '제발 행복해지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다
===
'잘' 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성공'적인 워홀을 보내고 싶은 생각도 없다
고생도 해보고 싶고, 좀 이것 저것 다양하게 경험하고 싶다.
그리고 성공의 기준은 모두 다를테니.
돈- 벌어오면 좋은 것일 뿐.
목표 금액은 한화 1000만원/호주달러 1만불이지만,
만족할만한 금액은 한화 5백만원/호주달러 5천불 정도이다
즐겁고, 행복하고, 자유롭고, 가슴아프고, 괴롭고, 힘들고, 외롭고-
모든 감정들을 느끼며
힘껏 크게 웃고, 힘껏 엉엉 울고,
내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표출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한국에서의 3년간의 생활하면서, 4년 간의 일본 생활에 대해 내가 가장 그리워한 것은,
모든 감정들에 솔직했던 나 자신이었다
웃고, 울고, 화내고, 즐거워하고.
3년 동안 사방에서 칼로 쳐내진 기분이다
나는 다시 내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살아있음'을 느끼며 산다면, 그걸로 됐다
한국으로 돌아와 3년 동안 만난 사람들이 내게 오지랖을 떠는 이유는,
내가 그들에게 보여준 모습이 '무기력한 시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되'찾는 것에 중점을 두고 싶다
나 스스로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진행한다는 점은 느껴지지 않고,
마치 영화 시작 20분 전까지 취소 가능한 영화 예매하고 자는 기분으로 비행기를 예매했다
날짜도 마구 정했다
골라놓은 날짜 5일과 10일 중에서
5일은 도착하면 바로 주말이라는 이유(일본에 간 날은 금요일이었고, 나는 이틀 동안 손가락만 빨았다) 때문에
바로 10일로 결정, 예매.
예전에 키요세 집을 구할 떄,
너무 머리 아프고 귀찮은 나머지 집을 그냥 질러버렸더니, 엄마였나 여동생이었나가
'너무 생각 없이 지르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번 호주 건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크게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진지하게 준비한 것이 아닌 만큼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또 이렇게 해야된다고 생각한다
남들처럼 긴 시간 준비한 게 아니다
8월 말, 이미 호주로 가기로 정한 상태였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온 한국 생활에 대한 스트레스, 하루라도 빨리 '내가 이곳을 떠난다'라는 걸 증거를 만들어야만
내가 마음이 편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나는 이제 한국에서 그만 살고 싶다.
사람들과 사회에게 받는 스트레스도 크고,
무엇보다도 서른이라는 1년을 두고 생각해 보았을 떄, 아무 것도 안 한 것만 같아,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 자체가 아깝다라는 생각을 하니,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단 두 달이라도 꿈틀대기라도 해서 이 1년을 그냥 시체처럼 지냈다는 오명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알바-백수를 반복했던 21, 22, 23의 반, 이 2년 반의 시간이 나는 무척 아깝고 아쉽다
좀 더 농도 있게 살았으면 좋았을텐데-라고.
물론 당시에는 마음 껏 뒹굴거리고, 책도 많이 읽었던 시절이라 딱히 100% 후회되는 건 아니지만,
그 시절을 늘어지게 보냈다는 것이 두고 두고 아쉽다
그러다보니 똑같은 시간을 나이 서른에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
내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나누고 싶지 않지만, 한국에 돌아와 새로 사귄 사람들과 그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반응이 확연히 갈린다
새로 사귄 사람들은 친하든 안 친하든 한국 특유의 오지랖 걱정을 발사해준다
'결혼해야하지 않냐, 너도 니 인생을 준비해야하지 않냐' 등의 서로의 인생에 하나 영양가 없는 명절st의 질문들.
정말 신기한 게 나와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 가족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이미 포기한 상태인 걸까.
2011년 3월 지진 직전에 여동생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놀러왔었다(지진 맞고 바로 귀국)
여동생과 함께 이케부쿠로 선샤인시티 지하의 오코노미야키 가게에서 함께 식사를 할 때, 여동생이 말했다
"엄마랑 나는 그냥 언니가 뭘 하든 냅두기로 했어ㅋ 언닌 그래야 하는 사람이야ㅋ 엄마랑 언니는 그냥 일본에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했어ㅋㅋ 언니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ㅋㅋ"
이번 호주 건도 엄마에게만 넌지시 말하고 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아마 페이스북으로 보고, 엄마에게 물어보는 정도일테다
여동생은 호주 워킹 건에 대해 처음으로 코멘트를 했다(페이스북에)
"내 생일선물 안주려고 튀는건아니지??ㅎㅎ 호주에서 보내주려고 그런거지??ㅎ"(여동생의 생일은 11/12이다)
가족은 내게 장녀로서의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인생을 산다
풍족하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았던 가정환경에서,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지원해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주었다
지원해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을 때, 우리 삼남매는 각자 알아서 각자의 방법으로 해결했고,
부모님이나 형제가 서로에게 이를 못하게 하거나 한 적도 없다
난 이점이 무척 고맙다
친구들,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마운 것은, 내게 저 오지랖 걱정을 펼치며 말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애초에 한국 생활은 길지 않고, 다시 출구할 것이라고 못을 박고 시작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 명 쯤은 '그래도...'라면서 말릴 법 하건만, 말리기는 커녕 많은 응원을 받고 있다
특히 호주행은 지난 겨울, 지인의 예상치 못한 사망으로 취소했다가 재개하는 만큼,
다들 그러려니- 하는 듯 하다.
근데 사실,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응원인지 모를테다
거기다 '대놓고 응원'해주면, 그 응원에 힘입어 발을 동동 구르다가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
하고 싶은 것은 많다
거주형태는 쉐어가 될테고, 한국인을 제외한 아시아인, 유럽인 등이었으면 좋겠다
한국인, 미국인은 피하고 싶다
일은 기왕이면 스시 레스토랑에서 하고 싶다
매일 스시 먹고 싶다 몸에 방사능은 쌓여가겠지만 아이 돈't 케어.
와따시와 스데니 호-샤노-노 카타마리다제.
기왕이면 시티쪽에 살고 싶다
가서 사진을 많이 찍고 싶다(사실 머리 속엔 이 생각 뿐이다)
돌아다니면서 사진 많이 찍어야지
가볍게 그림도 그리고 싶다
언젠가는 책 내고 싶으니까(....) 결과물 공개는 해야지.
페이스북 페이지는 '긍정적인' 사진들로만 올릴 예정. 텍스트는 최소화하고.
텍스트의 경우엔 네이버 블로그 전체공개+페이스북 친구공개를 이용할까 한다
페이스북은 노출도와 전파력이 높은 매체이다
굳이 불특정 다수의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을 공유하고 싶은 것은 내 주변 사람들 뿐이다
불특정 다수에게는 '좋아요'를 많이 눌러줄 법한 적당한 예쁜 사진 정도로만.
포장할 건 해야지. 포장 안 된 속살은 내 주변에게만.
외국 생활이 마냥 좋을 수 만은 없다
일본 생활도 지금 그 상황이 아니니까 좋았다 그립다 하는 거지,
사실 당시에는 시궁창이 따로 없었고, 매년 '제발 행복해지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다
===
'잘' 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성공'적인 워홀을 보내고 싶은 생각도 없다
고생도 해보고 싶고, 좀 이것 저것 다양하게 경험하고 싶다.
그리고 성공의 기준은 모두 다를테니.
돈- 벌어오면 좋은 것일 뿐.
목표 금액은 한화 1000만원/호주달러 1만불이지만,
만족할만한 금액은 한화 5백만원/호주달러 5천불 정도이다
즐겁고, 행복하고, 자유롭고, 가슴아프고, 괴롭고, 힘들고, 외롭고-
모든 감정들을 느끼며
힘껏 크게 웃고, 힘껏 엉엉 울고,
내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표출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한국에서의 3년간의 생활하면서, 4년 간의 일본 생활에 대해 내가 가장 그리워한 것은,
모든 감정들에 솔직했던 나 자신이었다
웃고, 울고, 화내고, 즐거워하고.
3년 동안 사방에서 칼로 쳐내진 기분이다
나는 다시 내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살아있음'을 느끼며 산다면, 그걸로 됐다
한국으로 돌아와 3년 동안 만난 사람들이 내게 오지랖을 떠는 이유는,
내가 그들에게 보여준 모습이 '무기력한 시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되'찾는 것에 중점을 두고 싶다